배수의 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얘기다

전부터 고통받던 문제인데, 난 상당히 강박적인 성격이다. A라고 했으면 A가 되어야 하고, A'가 되어버리면 그걸로 스트레스 받고 고통받는 성격이다. 남들보다 예민하고 강박적이라 이런 성격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다른 얘기지만 이런 성격으로 결혼까지 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아내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환자가 둘 있다. 하나는 전신 75%의 화상이고 다른 하나는 전신 60% 정도의 화상이다. 둘 다 가족들이 최선을 다해 달라고 하고 있고, 두 명의 환자 때문에 난 앉으나 서나 계속 환자 걱정을 하고 있다.
뭐 걱정이라고 해봐야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것은 아니고 순수하게 이성적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째서 지금 소변이 이것밖에 안 나오는지, 왜 열이 떨어지지 않는지, 왜 혈압이 안정되지 않는지, 이런 것들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 화상환자들은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환자분께 감사할 노릇이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지만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한다.

환자는 높은 수준의 진정제와 진통제로 의식이 없는 상태이고, 보호자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실수하면 나는 괜찮지만 환자는 잘못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재미로 하는 장기라면 한 수 물러달라고 졸라볼 수도 있겠지만 이 싸움에는 뒤가 없다. 어떻게 뒤로 물러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극히 일부의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 단 한 수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스트레스가 극에 닿는 상황이 되면 도망가고 싶고, 그만두고 싶고, 모른채 하고 싶어진다. 마음 한 구석에서 차라리 환자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모든걸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고작 일주일 정도 흘렀지만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끝임없이 흝고 지나가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쉬고 싶고, 생각하기 싫고, 도망치고 싶고. 차라리 핵전쟁이 일어나서 온 세상이 뒤집어져 버리면...
그런데... 나는 쉴 수 있고, 도망갈 수 있지만 환자는 아무데도 못 간다. 다시 말해 뒤가 없는 상황이다.

배수의 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의식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대표하고 있고, 내가 쓰러지면 환자도 쓰러진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한 배를 탔다면, 그리고 뒤가 없다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피곤하다. 그렇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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