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고민

지금 다니는 병원이 조금 불안불안 하다

지난해 수십억 적자가 났다고 하더니, 12월 말에 갑자기 전문의들에게 나눠줬던 법인카드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해외학회 참가 지원금도 끊어 버렸고.
그리고 며칠 전에는 대장 과장님이 황당한 얘기를 했다. 부원장이 올해 있을 병원 인증평가도 못하게 하려고 하고, 인증평가와 관련된 병원내 시설 유지보수도 못하게 하려고 하고, 심지어 기관 윤리위원회(IRB) 간사도 해고시키려고 한다고.

진짜 이 말대로 처리가 되면 우리 병원은 논문도 쓸 수 없는 병원이 되고, 논문을 쓸 수 없으니 전공의도 뽑지 못하게 되고 병원 인증평가도 통과하지 못해서 진짜 ‘이상한 병원’이 되어버린다.
다른 선생님들은 “뭐 이렇게 말도 안 통하고 의료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부원장이 들어와서 고생을 시키냐”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난 광고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한 형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구조조정

이번 일이 있기 한참 전에 그 형이 그런 얘기를 했었다. 2020년은 어감이 매우 좋은 해라서 구조조정 하기는 딱 좋다고. “미래 뭐시기 2020″이런 프로젝트 네임을 붙여서 구조조정 하면 된다고. 그러면서 구조조정의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1. 현재 적자를 확인함
  2. 기존 시스템이 제대로 못 돌아가게 훼방을 놓음
  3. 기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적자는 더욱 커지고, 업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떠남
  4. 직장이 어수선해지고 제 기능을 못함
  5. 장기적인 누적적자와 기능상실, 그리고 직원수의 감소를 핑계로 병원이 위기에 몰렸다고 판단하여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함
  6. 구조조정 시작함. 정리해고를 진행하고 불만세력의 힘을 빼냄
  7. 구조조정이 끝남.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상위기관에서 대규모 지원을 받아 병원 자체를 새로 설립하는 느낌으로 만듬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재 2단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로는 올해가 지나면 병원 누적적자가 100억을 넘게 되거든. 아, 솔직하게 말하면 2월말이 되면 100억을 찍을거다. 그러면, 진짜 그 형 이야기처럼 구조조정의 빌미가 만들어지는 거지.
이 와중에 젊은 선생님들의 분위기를 보면, “더럽고 치사해서 다른 병원 알아본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단계에 가깝다.

원래 난 적자와 관계없이 올해가 우리병원의 전환점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누적적자가 많이 쌓였지만, 대부분의 적자는 병원 리모델링 비용이었고 진료수익이 줄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의사들이 너무 많이 그만둬서 발생한 진료수익 감소도 원인이 되기는 했다. 그걸 2019년 동안 열심히 보충해서 이제 간신히 의사수가 정상화 되었다.
그래서 혼자 생각으로는 2020년인 올해 대규모 광고를 통해 병원 이미지를 개선하고 환자를 유인하면 적자폭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예상을 했다. 반경 5km내에 120만이나 사는 지역이라, 충분히 광고하고 이미지 개선을 하면 많은 환자가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었나 보다.

솔직히 병원 구조조정을 바라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알고 있지만, 난 구조조정이 싫다. 한국의 병원이라는 것이 구조조정 한 번 한다고 갑자기 수익이 날 수 있을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진료수익은 +/- 0에 가깝고, 병원은 주차장과 부대시설로 돈을 버는 구조니까 말이다. 괜히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 잘라내고 병원 분위기만 망칠 가능성이 높아서 마음속으로 반대하며 지냈다.
그런데 우리병원 부원장이나 행정직 직원들 생각은 다른가 보다. 그리고… 구조조정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는 것 같고.

잘 모르겠다. 나야… 일개 직원일 뿐이고 환자만 볼 줄 아는 사람이라 이런 큰 변화는 익숙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내 밥줄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 요즘 고민을 좀 하긴 했다. 혼자 생각해 본 것은 어떻게든 날 자를때까지 버티다가 새로 생긴다는 소방병원에 취직하는 방법, 아니면 그냥 요양병원 의사나 하는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이제와서 개원을 해봐야 다양한 기술로 중무장한 개원의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돈도 없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나의 약점 때문에, 이 상황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월급 받는 입장이라 이런 변화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지. 은행 대출금도 있고 아이도 크고 있으니 어떻게든 돈 벌며 살아야지. 그것 말고 달리 방법도 없고. 아무튼 고민이다.

댓글